12 5월 2026

채울 수 없는 빈자리: 완벽한 기계가 인간의 결핍을 대신할 수 없는 이유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정준하는 회사를 올려다봤다. 10년이 넘는 세월, 청춘을 다 바친 대가는 고작 종이상자 하나 분량으로 너무나도 앙상하게 정리되어 버렸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무한상사의 정 과장이 아니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가 무심하게 깔리는 가운데, 하루아침에 책상을 빼야 했던 그는 뙤약볕이 쏟아지는 대낮의 거리를 터덜터덜 걸었다. <무한도전> 8주년 특집이었던 ‘뮤지컬 무한상사’ 1부는 그렇게 끝났다. 기막힌 반전도, 희망찬 2부 예고 따위도 없이 지독하게 건조하고 살풍경했다.

“뭐야, 진짜 이대로 그냥 끝이라고?” 언제나 유쾌한 해답을 주리라 믿었던 예능 프로그램에서 정리해고라는 무거운 화두를 이토록 차갑게 던질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방송 직후 수많은 시청자들은 혼란에 빠졌다. 누군가는 뼈아픈 실직의 기억을 떠올리며 울음을 삼켰고, 누군가는 내 목이 날아가지 않은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했던 직장 생활의 서글픈 순간을 곱씹었다. 인터넷 커뮤니티마다 ‘가슴이 먹먹해서 티비를 껐다’, ‘도저히 맨정신으로 못 봐서 술을 마셨다’는 탄식이 줄을 이었다. 심지어 정준하가 진짜 프로그램에서 하차하는 줄 알고 심장이 철렁했다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우리는 왜 밉상의 눈물에 공감했나 방송이 끝나기 무섭게, 예능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이 비극적 결말을 두고 온갖 해석이 쏟아졌다. 시대의 아픔을 무한도전만의 방식으로 녹여냈다느니, 원치 않게 MBC를 떠나야 했던 동료들을 향한 김태호 PD의 위로라느니, 원래부터 아픔을 정면 돌파하던 쇼였다느니 말이다. 그런데 다들 결말에 의미를 부여하느라 바쁠 때, 나는 불현듯 묘한 기시감에 휩싸였다. 정준하를 쇼에서 제발 빼버리라고 사람들이 아우성치던 게 불과 몇 년 전 일이었기 때문이다.

관련 리뷰를 쓰다 보니 “정형돈이랑 정준하는 도대체 왜 안 잘리고 계속 나오는 거냐”는 질문을 질리도록 받던 시절이 있었다. 그나마 정형돈에 대한 애정이 깊던 나는 “저들도 샌드백 역할을 묵묵히 수행 중이며 언젠가 포텐을 터뜨릴 것”이라고 옹호하곤 했지만, 솔직히 정준하에 대해서만큼은 나조차도 속으로 ‘저 형은 어떻게 저렇게 오래 버티지?’ 싶을 때가 있었다. 조금만 수위 높은 농담을 던져도 미간을 찌푸리며 정색하고, 본인이 받기 힘든 무리수를 던져놓고는 상대가 안 받아준다고 징징대기 일쑤였다. 매주 흐름을 뚝뚝 끊어먹는 그 끈질긴 밉상 짓은 어떤 의미에선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방어기제에 찌들어 툭하면 자기 변호만 늘어놓는 소심한 성격 탓에 오히려 일을 키우고 사서 욕을 먹던 그였다.

하지만 얄밉고 답답하기만 했던 그 불완전한 모습조차 긴 시간 켜켜이 쌓여 하나의 서사가 되었을 때, 우리는 가상의 시나리오 속 그의 부재 앞에서도 기꺼이 눈물을 흘렸다. 누군가를 다른 무언가로 완벽히 ‘대체’한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영역에서는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로봇이 빈자리를 채우는 시대, 스크린이 던지는 질문 흥미롭게도 이 ‘상실’과 ‘대체 가능성’에 대한 질문은 최근 스크린으로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배급사 미디어캐슬에 따르면,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신작 <상자 속의 양> 홍보차 오는 6월 4일과 5일 양일간 아역 배우 쿠와키 리무와 함께 한국을 찾는다.

이번 영화는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들의 텅 빈 자리를, 아들과 똑같이 생긴 휴머노이드 로봇을 가족으로 들이며 채우려는 한 일본인 부부의 이야기를 그린다. 언제나 징징대고 맥을 끊던 예능 속 정준하의 빈자리와, 죽은 아들을 완벽하게 프로그래밍된 기계로 대체하려는 영화 속 부부의 선택은 묘한 대조를 이룬다. 인간의 상실감과 기계의 완벽함 사이에서 흔들리는 감정선을 섬세하게 빚어낸 이 SF 드라마는, 이미 올해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된 22편의 쟁쟁한 작품들 중 하나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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